구한말 마라톤 선구자들1: 김성택
구한말, 잘 뛰어서 벼락출세한 인물들이 있다. 1882년 일본식 신식군대 별기군이 창설되면서 푸대접을 받게 된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대원군의 사주 아래 일본인 훈련교관뿐 아니라 병조판서 민겸호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을 살해하자,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을 입고 충주 장호원에 있는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급히 피신한다. 이때 명성황후의 피난 가마를 들고 뛴 이가 바로 김성택인데, 그는 임오군란이 청나라의 도움으로 평정되고 명성황후가 환궁하자 전라도 장흥의 부사가 되는 벼락출세를 한다.
구한말 마라톤 선구자들2: 이용익
또 다른 인물은 바로 이용익이다. 그는 구한말 실물경제의 선구자로, 근대기업인의 효시로 꼽히는 인물이다. 중앙은행 총재, 탁지부 대신, 그리고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내장원경을 지냈으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이용익은 임오군란 당시 서민 출신으로 일개 등짐장수였다. 명성황후가 장호원에 피신했을 때 그는 서울의 민씨 일가와의 연락을 담당했다. 15민씨 일가의 실세였던 민영익은 전주에서 서울까지 500리 길을 하루 만에 달려왔다는 등짐장수 이야기를 명성황후에게 고했고, 이를 전해들은 고종황제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고종은 전라감사에게 봉서를 보내면서 답신에 발송일시를 적고는 심부름보낸 이용익에게 다시 맡겨 서울로 보내라 명한다. 이튿날 오후 8시에 도착한 이용익이 가져온 답봉서에는 발부시간이 그날 오전 8시로 적혀 있었으니 서울전주간 500리길(약 200km)을 이용익은 12시간에 달린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일까? 42.195km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의 이봉주는 한국 최고기록인 2시간7분20초의 기록을 세울 때 평균 시속 19.87km에 달렸는데, 이용익은 시간당 약 17km의 속도로 약 200km를 주파한 것이다. 그것도 도포 자락 휘날리며 산넘고 물 건너 말이다.
사실 중간에 몰래 말을 타고 달렸을지 확인할 방도가 없지만 그의 비법은 무엇일까. 놀란 고종이 이용익을 불러 그의 보법을 묻자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단지 두루마기의 뒷자락을 깃발처럼 나부끼게 하여 후퇴부에 붙지 않게만 하면 속보가 가능하다고 말이다. 신기를 넘어 신비할 뿐이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조정에 들어가게 된 이용익은 훗날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는데, 어전회의에서 머리를 조아린 신하들 앞에서 고종이 그와는 귀엣말을 나눌 정도였다고 한다.
구한말 마라톤 선구자들3: 마봉옥, 이성근, 김은배, 손기정
우리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을 기억한다. 그러나 손기정 이전에 우리 육상은 이미 세계적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1927년 마봉옥이란 선수가 지금의 전국체전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신궁대회에서 3시간29분37초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마라톤의 첫 공식기록을 수립한 이후, 1930년 인력거꾼이었던 이성근이 2시간36분30초로 골인하며 우승했다. 이듬해 10월 18일엔 양정고보의 고교생 김은배가 당시 세계기록을 무려 5분이나 앞당긴 2시간26분12초의 비공인 세계기록으로 조선신궁대회에서 우승하기에 이른다.
김은배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어 조선체육회, 조선운동기자단, 고려육상경기회, 양정고보동창회에서 특별상을 수여했고, 윤치호와 송진우 등 당대거물들이 나서서 축사를 하기까지 했다. 10월 20일 『동아일보』는 1면 사설 「세계기록 돌파 조선의 자랑에서 이씨 왕조가 조선민족을 세계의 벽지에 유폐된 은자로 만들었으나 스포츠가 이를 바꿔놓았고 그의 기록은 “조선인의 천품상 또는 기질상의 결함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흥분했다.
이렇게 서구를 인식하면서 갖게 된 민족적 열등감을 날려버린 것이 바로 스포츠였다. 일본보다 늦게 스포츠를 도입했지만 축구 ·농구 · 권투 · 야구에서 일본을 이기곤 했고, 특히 마라톤에선 당시 세계적 강국이던 일본을 금방 따라잡았다. 스포츠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된 1920년대부터는 스포츠에 대한 조선인들의 관심이 급격히 증가했고, 언론은 스포츠를 주요 뉴스로 삼았으며 유명 운동선수는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김은배는 1932년 LA올림픽에 비록 일본대표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지만 조선인으로선 처음 출전하여 6위를, 권태하는 9위를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올렸다. 조선 마라톤의 저력은 역시 양정고보 6년생이었던 스물네 살 청년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한 많은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면서 꽃을 피웠다.
그렇다면 양반은 양반이라 안 뛰고, 천민은 먹은 거 꺼질까봐 안 뛰고, 할머니들은 “배 꺼진다. 뛰지 마라”며 뛰는 손자를 붙들어 세우던 시절, 조선이 어떻게 일약 육상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물론 당시 지식인들이 체육을 중시하고 경쟁을 장려하면서 조선인들의 눈에 마라톤이 획기적인 유행상품으로 다가설 수 있었겠지만 그 기저에는 다양한 ‘달리는 직업’ 의 등장이라는 사회적 변화도 한몫하고 있었다. 등짐장수, 물장수, 인력거꾼, 신문배달부 등이 등장하면서 젊은이들이 시내를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이들이 달리기대회에 출전해 상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달리기에서만큼은 ‘프로’였다. 1920년 경복궁 마당에서 열린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벌어진 단축마라톤에서 우승한 이가 스물네 살 먹은 조선인 인력거꾼 최원기였고, 이성근도 원래는 인력거꾼이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였던 그리스의 스피리돈 루이스가 그리스 마루시 마을의 우편집배원이었듯, 초창기 마라톤의 강자들은 평소 죽어라 뛰던 사람들이었다.
참조: 조선 최초의 스포츠 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