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스포츠 세계화 효시: 복싱
조선의 스포츠는 일제의 통제 속에서도 대중의 열광적 환호와 함께 성장해갔는데, 이중에서도 최고의 빅카드는 언제나 일본선수들과의 경기였다. 모든 종목이 그랬다. 일본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면 그것은 민족의 자랑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 맛에 살았다. 그러나 조선의 스포츠가 일본을 완전히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축구와 야구의 경우에는 조선을 방문한 일본팀들과는 대등한 경기를 벌였지만, 적지인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아무래도 밀리기 마련이었다. 엄복동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인들이 데려온 일본선수들을 곧잘 제쳐버리긴 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겨룬 적은 없었다.(아마도 마라톤의 손기정, 남승룡 정도가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본선수들을 압도한 세계적 수준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한국과 일본 위주로 활동하던 여타 종목들과는 달리 일본선수들을 압도했을 뿐 아니라 상하이, 마닐라, 콜롬보, 하와이는 물론 미국 본토에까지 원정경기를 가서 이름을 떨친 종목이 있었으니, 바로 복싱이었다.
‘동양참피언’: 건달 김창엽
1912년 단성사의 주인인 박승필이 유각권투구락부를 출범시켜 유도, 씨름과 함께 권투를 선보인 이래 주로 YMCA에서 행해지다가 1928년에 이르러서야 제1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가 열렸으니, 다른 종목에 비해서는 정착이 다소 늦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초기엔 권투장갑 끼는 것 외엔 규칙에 대한 개념(?)이 없어 벨트 아래고 위고 그냥 막 패는 그런 식이었다. 선수가 링에서 뛰쳐 내려와 싸우기도 했고, 당연히(!) 패싸움으로 번져 아수라장이 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곧 기량이 일취월장하여 1929년 11월 제2회 일본가미야마대회에서는 조선선수들이 출전해 5명의 우승자를 배출해내는 개가를 올린다. 이후 황을수·김창엽·박용진·현해남 등이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고, 그중 YMCA 영어과 출신으로 메이지대학에 재학했던 황을수는 1931년에 최초로 필리핀 마닐라로 건너가 원정경기를 갖기도 했다. 그는 1932년엔 마라톤의 김은배· 권태하 등과 함께 조선인으로선 최초로 LA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
당시엔 복싱이 주먹을 쓰는 운동이라 그런지 경성 안의 이른바 ‘주먹’ 들이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제1회 대회 때는 유명한 수표교 건달 김창엽이 “나도 출전하겠소” 하며 신청을 했다. 주먹 센 건달패로선 당연히 링 위의 선수들이 같잖아 보였을 것이다. 부하들까지 몰려와 요란하게 응원하는 가운데 몸집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김창엽이 곱상하게 생긴 김충성과 밴텀급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주먹 쓰는 거라 해도 복싱이라는 스포츠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예상 외로 1라운드를 막상막하로 보낸 김창엽은 2라운드에서 김충성의 주먹에 나가 떨어져 KO패하고, 이를 본 수표교 건달들이 몰려 나와 김충성을 서로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경기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결국 이 경기는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고, 김창엽에겐 망신살 뻗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김창엽은 정식으로 복싱을 배워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복서가 됐고, 1934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10회 극동선수권대회에서는 동양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전설적 복서’ 현해남
현해남도 ‘전설적인 복서’ 에 들어갈 만한 인물이다. 열일곱에 일본에 건너가 프로에 입문한 이후 1936년 밴텀급, 37년 페더급 챔피언이 된다. 최고의 경기는 39년 일본의 복싱영웅 피스톤 호리구치(통산 전적 186전 145승 88KO 25패 16무)와의 경기였다. 호리구치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경기를 할 정도로 타고난 파이터로 첫 패배를 당했을 때 그의 전적은 49승 35KO 6무였다. 체급도 가리지 않아 페더급 선수임에도 미들급 선수와 싸워 KO승을 거둬 미들급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던 그는 일본 복싱 역사상 최고라 평가받는 선수다. 현해남은 당시 63승 1패 6무의 최전성기였던 그를 12회 판정으로 눌러 일본열도를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현해남은 1937~39년 미국으로 진출해 스물한 차례 경기를 치르기도 한다.
‘복싱의 신’ 독침 서정권
그런데 미국에 최초로 건너가 그곳에서만 51전을 치르고 세계랭킹 6위에까지 오른 조선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복싱의 신’으로 불리던 ‘독침’ 서정권이다. 1912년 순천 갑부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29년 열일곱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황을수에게 권투를 배웠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그는 이듬해 전일본아마추어선수권대회 등 3개 대회에서 우승하고, 1931년 열아홉에 프로로 전향한다. 그리고 프로 데뷔 1년 동안 27전 전승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서정권은 일본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193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미국 무대 데뷔 후 4연속 KO승을 거두며 일약 밴텀급 세계랭킹 6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가 1935년 귀국했을 때 조선은 난리가 났었다. 총독부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라고 차를 내줄 정도였고, 동대문에서 열린 귀국 환영경기에선 여운형이 6000여 관중 앞에서 격려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날의 감격스러움은 당시 한 월간지의 기사한 토막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5척 어린 청년 앞에 전세계의 코끼리 같은 양키들이 피하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음에 우리들은 그와 피와 산천을 같이 하였음을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이리하여 아, 동방에도 우리 반도에는 세계적으로 우러러보는 새로운 영웅 한 분이 나타났다.
이 경기에서 강적 라슈 조를 4회 TKO로 물리치지만 이후 그는 살인적 스케줄, 경기 후유증, 도박, 그리고 돈만 밝히는 미국 복싱 프로모터들의 착취로 인해 결국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수년간 고군분투하며 세계 최고의 기량과 겨룬 최초의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광수도 「스포오츠열」이라는 글에서 서정권을 찬양해 마지않았다. 복싱은 진정으로 조선인들을 미치게 했다. 마라톤에서, 자전거경주에서, 야구에서 아무리 대단한 선수가 나왔어도 복싱처럼 일본선수를, 서양선수를 우리 눈앞에서 두들겨 팬(?) 종목은 없었다. 함성과 함께 “때려라” “죽여라”가 절로 나왔다. 아마 미디어가 지금과 같았더라면 박찬호 · 박지성 못지않게 온 국민이 열광적 환호를 보냈을 인물이다.
당시 해외에서 성과를 거둔 복싱선수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배경은 조금 서글프다. 1930년대 조선 출신 선수들이 일본 등 해외로 진출하면서 개가를 올리고 30년대 후반엔 일본 권투계를 거의 평정하다시피 했지만, 정작 국내 복싱계는 사양길에 접어들어 있었다. 1937년 일제는 복싱을 적성 스포츠라 하여 모든 활동을 중단시켜 많은 선수들이 일본, 중국, 필리핀으로 가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40년에는 2차대전이 점점 확전되면서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대부분의 일본인 선수들이 군대에 들어가 일본 권투계는 조선 출신 선수들의 독무대가 되는 듯했지만, 일본이 곧 전면 복싱 금지령을 내려 42년경부터 젊은 복서들은 다시 떠돌이 복서의 길로 들어서야 했다. 나라 잃으면 스포츠 선수들마저 디아스포라의 고단함을 느끼게 되는 듯하다.
어쨌든 마라톤과 함께 가장 세계적 수준에 근접했던 당시 복싱은 스포츠 세계화의 효시였다. 한국 스포츠사에서 세계화를 논할 때 흔히들 70~80년대의 프로복싱을 그 단초라 이야기하지만, 그 기반은 이미 일제 강점기에 다져졌다. 해방 후 올림픽 메달이 가뭄에 나는 콩보다도 더 귀할 때 조국에 연이어 메달을 선사한 것도 바로 복싱이었다.
참조: 조선 스포츠의 아버지: 여운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