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스포츠 스타

구한말 최고의 속도감을 선사하는 스포츠: 자전거대회

가마꾼 없이 스스로 가는 수레, 즉 자행거가 지나가는 모습은 조선인들의 눈에는 곡예로 보였다. 어떤 이들은 그 경이적(?) 속도에 놀라 심지어 축지라 부르기도 했다. 1880년대 중반 미국인에 의해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자전거는 고종황제의 호기심을 끌기도 했다. 1893년 한국에 와서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설립한 올리버 에비슨은 자전거 애호가였다. 어느 날 그가 고종을 만난 자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궁궐에 왔다고 하자 고종은 이를 가져오게 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두 바퀴로 가는데 쓰러지질 않는지 궁금해서였다. 결국 에비슨은 고종 앞에서 궁궐마당을 뺑뺑 돌았다고 한다.

당시 외국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서울을 누비면 조선 사람들이 몰려들어 입을 벌리고 닫을 줄을 몰랐다. 미국 공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은 1896년 「한국에서의 자전거 체험」이란 글을 영문잡지 『코리언 리포지토리』에 실었는데, 당시 한국엔 14대의 자전거가 굴러다닌다면서 한국에서 자전거를 탈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얼굴을 가린 장옷 입은 여인들을 만났을 때와 엎드려 자고 있는 개를 만났을 때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 신기한 외국 문물을 한국인들은 곧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나보다. 1890년대 후반 올리버 에비슨이 길에 나서서 지나가는 자전거 수를 헤아려보니 1분에 120대에 이르렀고, 서양 사람만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이제는 심부름 하는 소년이나 상점의 배달 소녀들까지 타고 다니고 있었다. 1906년엔 첫 자전거대회가 지금은 헐린 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열렸고, 이후 자전거상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자전거 보급을 위해 대회를 열어 상금과 상품을 주기 시작했다. 당시 자전거대회는 최고의 속도감을 선사하는 스포츠였고, 곡마단 서커스 못지않은 구경거리였기에 관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스포츠 스타, 엄복동 사진

자전거대왕 엄복동

당시 평택에는 일미상회라는 자전거 점포에서 일하는 엄복동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평택과 서울을 오가며 자전거 행상으로 실력을 키운 그는 1913년 4월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 출전한다. 용산 연병장에서 벌어진 경기엔 10만여 관중이 모였는데, 엄복동은 여기서 우승하며 ‘자전차대왕‘ 이라 불리게 된다. 당시 국권 상실의 암울한 현실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그리고 온데간데 없던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아준 쾌거로 온 백성의 감격은 절정에 달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민족에게 불세출의 스타였다. ‘스타’라고 이름 붙일만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스포츠 스타였고 민족의 스타였다. 사람들은 그를 ‘자전차대왕’ ‘자전차귀신’이라 불렀다. 그의 유니폼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빨간색이었고 경주법도 특이했다. 선두를 쫓아가다가 마지막 한 바퀴를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갑자기 엉덩이를 들어올린 뒤 열나게 페달을 밟아 선두를 제쳐버렸다. 그가 엉덩이를 치켜들면 사람들은 “올라간다, 올라간다”를 외치며 함성을 질러댔다고 한다. 그의 엉덩이는 승리의 약속하는 엉덩이였던 것이다.

『시대일보』는 1926년 6월 18일자 기사에서 엄복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조선은 물론 만주와 일본까지 경주대회만 있다 하면 의례히 빼어놓지 아니하고 번번이 조선인으로서 출장하여 외국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시기와 흠망을 받아 전후 오십여 번의 우승기와 수천 수만의 상품을 얻어서 조선의 방방곡곡은 말할 것도 없이 해외에까지 그의 이름을 모를 사람이 없고(…)”

그는 성깔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1920년 5월 3일 열린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일본에서 자전거를 제일 잘 탄다는 모리 다카히로 등과 50바퀴 경주를 벌였을 때의 일이다. 경기 도중에 선수들끼리 부딪쳐 모두 떨어져 나가고 결국 엄복동과 다카히로 둘만 남게 됐는데, 엄복동은 다카히로보다 세 바퀴나 앞서 있어서 그의 여유 있는 우승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엄복동에게 승리를 내준 일본인들이 일몰을 이유로 경기를 갑자기 중단시켜 버렸다.

이에 화가 치민 엄복동은 본부석에 뛰어들어 우승기를 꺾어버렸고, 그러자 옆에 있던 일본인들이 엄복동에게 몰매를 가해 그가 피를 흘리고 쓰러지자 관중들이 뛰어들어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상황을 “엄군이 마침내 목에 상처를 내고 피까지 흘니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마저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가치 달녀드러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형형색색 분개한 자들 때문에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엄복동은 일제 강점기 초기와 중기에 걸쳐 민족의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을 반일감정으로 들끓게 한 인물이었다. 당시 일제 통치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매일신보』조차 위 사건을 5월 5일자 「호소무처呼訴無處의 차한을? 조선사람은 우승기도 가질 자격이 없는가? 자행거 경주사건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렇게 분노한다.

우승기 쟁탈경쟁으로 말하면 실상은 각각 자기들의 실력경쟁이어늘 자기 밖의 실력이 우리 조선사람보다 물론 열등인 까닭에 실패한 것인데 그와 같은 실력경쟁에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을 하여 가지고 상당한 조선인에게 돌아올 우승기를 그와 같이 무리한 행동으로 주지 않는 일이 어디 있는지? 만약에 엄복동군이 땅에 엎드러지고 ‘삼하’라는 일본 선수가 여전히 돌아갔드면 역시 ‘삼하’에게 우승기를 주지 않을 뻔하였는가? 물론 엄복동군이 중간 실수로 땅에 엎드러졌드면 아마 그대들이 오죽 좋아서 춤을 추며 좋아하였으리요. (…) 아! 이 원통함을 어디에 호소하노?

일이 이렇게 되니, 이후 대회에서 일본인이 술에 취하든, 맨 정신이든 말썽만 부리면 모두들 ‘엄복동’이를 방해하려고 그러는 것이라 여겨 크고 작은 말썽이 이어졌다. 또 일본인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일본 최고의 선수들을 데려오곤했지만 엄복동은 이들마저도 눌러버려 “역시 엄복동!” 이란 말까지 유행하게 됐다. 그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모아놓고 그들로 하여금 ‘조선’을 확인케 했다. ‘상상의 공동체’가 운동장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엄복동은 1922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다시 한 번 일본인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하는데, 당시의 감격을 『매일신보』(1922년 5월 23일자)는 이렇게 전한다.

운동 중에는 아마 장쾌하고 볼만한 것은 자전거경주대회 밖에 다시 없을 듯하다. (…) 엄군은 평연히 뒤를 떨어져 가다가 차차 회수가 임박하며 (…) 엄복동군은 엉덩이 몇번 꿈적거리는 바람에 앞을 선 내지인을 멀리 뒤에 떨어뜨리자 (…)이에 수만 관중은 열광적으로 펄펄뛰며 손뼉치는 소리는 과연 너무나도 컸었는데 뒤에 떨어진 내지인 선수도 동경 대판서 제일등을 내여 놓지 않는다는 선수로서 그날의 떨어짐은 오죽이나 통분하였을까 (…) 내지인 편에는 일점의 생기가 없어지고 조선인 관중은 그라운드 장내까지 뛰여들어가서 좋아라고 뛰놀기를 마지 않았다. 우승한 엄복동군은 (…) 장내를 한번 일주하매 십만 관중의 환호성에엄군은 무쌍한 영광을 얻고 의기당당히 개가를 부르고(…)

마침 1922년은 한국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 안창남이 귀국하여 고국방문 기념비행을 한 해였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된다. 훗날 손기정과 함께 조선의 민족정신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두 인물이 바로 엄복동과 안창남이다.

애석한 점은 일제 강점기 엄복동의 인기에 비해 그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안창남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순서도 이런 사정을 암시하는 듯하다. 엄복동은 인기 면에서나 활동기간에서나 안창남에게 뒤질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비행기 조종사가 지닌 강렬한 엘리트적인 매력 때문인지, 당시 신문이나 잡지는 안창남과는 달리 인간 엄복동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듯하다. 사실 경기 예고나 결과가 아니면 그의 기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결국 엄복동은 그렇게 잊혀갔다. 그는 1930년대에 은퇴한 후 극히 불우한 삶을 살아간다. 광복 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동두천 부근의 어느 야산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무리한다. 민족을 하나되어 열광케 하고 민족의 기개를 떨쳤으면서도 시대의 애환을 온몸으로 겪다가,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생을 마감한 이가 바로 자전거대왕 엄복동이다.

참조: 1930년대 ‘오빠부대’ 를 불러온 야구천재 이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