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신생국의 스포츠 판타지

by Bikekim
스포츠 글자가 들어가 배너 모습

1950년대 신생국의 스포츠 판타지

1950년대엔 나라꼴도 말이 아니었다. 기차역 앞에는 검정고무신 신은 지게꾼들이 즐비했고 동냥 다니는 거지가 없는 동네가 없었다. 제대로 된 산업도 없었다. 변변한 국제교류도 있을 리 만무했다. 극소수 경제인들과 당시 아마도 유일한 엘리트집단이었을 공무원과 군인 중 고위급만이 연수 명목으로 외국을 다녀오는 정도였다.

이런 마당에 나라의 존재를, 코리아라는 이름을 알리는 거의 유일한 통로는 스포츠였다. 1947년 서윤복의 보스턴마라톤 제패가 이듬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UN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던 것처럼, 스포츠는 전쟁과 폐허의 이미지로 포장됐던 당시 한국의 현실을 극복하는 데 일조했다. 한국이 서서히 국제무대에 그 존재를 알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또 우리 선수들의 승전보에 온 국민이 기뻐했으니 스포츠는 당시 지치고 힘든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당시 스포츠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역할을 확실히 수행했다. 모든 게 어려웠고 혼란스러웠던 신생국가 대한민국에서 스포츠만큼 국가와 민족의 단결과 자부심을 일깨우는 대상은 찾기 힘들었다. 불안을 빌미로 한 강제 따위를 동원하지 않고도, 스포츠는 환호와 열광 속에서 국민들을 통합시켰다. 경기에서의 승리는 국가의 승리, 민족의 쾌거로 쉽게 전환됐다. 국민들에게 스포츠는 대한민국. <애국가> · 태극기와 뒤섞인 판타지였던 것이다.

식민지 경험이 생생한 1950년대 스포츠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역시 일본과의 경기였다.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1954년 스위스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축구 대표팀이 그 한을 풀어줬다. 그것도 적지인 일본으로 가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58년 월드컵은 축구협회 사무국장이 출전 신청서류를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는 까맣게 잊고서 연말업무에 치여 신청기한을 넘겨버린 통에 기회를 날려버렸지만, 그 대신 일본을 무찔러준(?) 이가 마라톤의 이창훈이었다. 그는 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 4위에 입상한 건각으로 훗날 손기정의 사위가 된 인물이다. 58년 일본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이창훈은 일본의 쟁쟁한 마라토너들을 따돌리고 도쿄 시내를 관통하는 코스를 달려 아시안게임 마라톤대회 최초의 우승자가 된다. 이 일은 특히 남한의 국민들뿐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70만 재일동포들을 감격케 했다. 조총련계 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이창훈에게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이창훈의 우승 이후 재일동포들이 명함의 이름을 일본식에서 한국식으로 바꿨을 정도였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가던 그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한껏 불어넣어준 것이다.

이렇듯 우리 선수들이 메달을 따면 온 국민이 열광했을 뿐 아니라 해외의 동포들도 그 소식에 감격했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우리의 처지를 반영하는 것인지 큰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오는 종목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 악물고 해야하거나 ‘악에 받쳐’ 뛰어야 하는 종목들이었다. 1948년 런던, 52년 헬싱키, 56년 멜버른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둘씩 땄는데, 공교롭게도 ‘복싱’ 하나, ‘역도’ 하나씩이었다. 그리고 이들 올림픽에서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당시 우리의 세계적 종목은 ‘마라톤’이었다. 스포츠 역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1950년대 스포츠는 이렇게 ‘울분’을 거름 삼아 뛰었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었다. 국가적’응원’은 있었지만,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정신력만으로 버티기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했다. 결국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한국은 ‘노 메달’ 이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또 전쟁 후 나라의 체계가 좀 잡히나했더니 외려 정치적 혼란이 온 사회를 휩쓸어버렸다. 1960년 자유당 독재에 신물이 난 국민들이 이승만 하야를 외치고 결국 4·19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것이다.

중앙대생이었던 이창훈도 혁명의 물결에 동참하게 된다. 옆에 서 있던 학생이 경찰측에서 날아온 총알에 총상을 입고 숨을 거두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한다. 결국 그는 5월 19일에 열린 로마올림픽 파견 마라톤 예선에 불참한다. 그러나 선발된 선수들의 기록이 이창훈의 종전 기록보다도 못해 협회가 추후 이창훈을 추가로 선발했다. 그러나 로마에서 그는 20위에 그친다. 가뜩이나 국가의 체계적인 지원이 없던 시절,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는 훈련에 집중해야 하는 선수들의 머리 역시 어지럽게 할 뿐이었다.

참조 : 한국축구 월드컵 첫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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