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이름으로 올림픽 첫 출전

KOREA 이름으로 올림픽 첫 출전

 

1948년 열린 제14회 런던올림픽은 세계대전으로 12회, 13회 대회가 무산된 후 12년 만에 열린 올림픽이었다. 우리에겐 KOREA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한 첫 대회였다. 대한올림픽위원회는 1947년 IOC의 승인을 받아 종목별로 선발전도 치렀다. 그러나 올림픽 출전은 역시 쉽지 않았다. 런던대회는 1948년 7월 29일 개막해 8월 14일에 끝났는데, 이때는 정부수립 이전이었다. 남한의 건국은 폐막 다음날인 8월 15일이었던 것이다. 선수단 출국은 역시 미 군정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육상 · 역도 · 복싱 · 레슬링 ·축구·농구에서 51명을 선발해 출전 신청을 했더니 군정청은 주한미군의 일개 부대팀한테도 지는 수준의 농구팀을 왜 보내냐면서 선수단을 줄여 다시 신청하라고 반려했다. 당시 마라톤, 복싱, 역도는 세계적 수준이었지만 참가에 의의를 둔 종목도 있었다. 그러나 늘리기는 쉬워도 줄이기는 어려운 법. 만약 줄였다간 탈락된 선수와 그 협회가 가만히 있지 않을 분위기였다.

이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이상백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자 KOC 부위원장이었던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농구선수와 코치로 활약하면서 미국 원정도 다녀왔고, 일본체육협회의 전무이사로서 베를린올림픽에 일본선수단 총무로 다녀왔던 국제통이었다. 그는 1952년 IOC위원장이 된 미국의 에이버리 브런디지와 친분이 있었는데, 이상백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브런디지가 한때 미국체육협회장을 지냈던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부탁해, 결국 한국대표단은 낙오자 없이 장도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 복권 발행해  올림픽 출전

국민들의 성원은 대단했다. 선수단의 올림픽 출전을 위해 올림픽후원회가 조직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복권인 ‘올림픽후원권’을 발행해 출전 경비를 충당하기로 했는데, 액면가 100원의 후원권이 140만 장이나 팔려나갔을 정도였다. 당시 고급담배였던 ‘공작’이 30원, 영화관람료가 40원이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6월 21일 종로2가 YMCA 회관에 모여 서울역까지 시가행진을 한 후 기차로 부산에 도착해 배를 타고는 런던으로의대여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후쿠오카-요코하마 -홍콩-방콕-캘커타-카라치-카이로암스테르담을 거쳐 무려 20일만에야 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유력한 메달 가망 종목은 마라톤이었다. 1년 전 보스턴마라톤대회를 제패한 서윤복과 스무 살의 철각 최윤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 바람과는 달리 이들의 성적은 저조했다. 특히 최윤칠은 경기 중반부터 35km 지점까지 선두로 달렸으나 38km 지점부터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경기를 포기해야 했다. 최초로 메달을 딴 선수는 역도의 김성집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였고,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역시 동메달을 획득해 2연속 메달 수상자가 되었다.   

 

‘밥도 못 먹고’  올림픽 동메달

가장 아쉬웠던 것은 복싱 플라이급 한수안의 동메달이었다. 상대방의 실력이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는 국제무대 첫 출전이었지만 한수안은 국내에서도 플라이급에서 미들급에 걸쳐 최강자로 군림하던 무적의 복서였다. 올림픽에서 그는 연전연승하여 준결승에 진출했다. 그는 단박에 우승후보로 부각됐다. 그러나 약소국 선수에겐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국제무대에서는 실력이었다.

런던 현지에서 한국선수단은 마라톤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마라톤선수에게만 신경을 썼다. 복싱팀은 런던 외곽의 초등학교에 묵었기에 차량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국선수단은 마라톤팀엔 차량을 지원했지만 복싱팀엔 무관심했다. 그래서 하루에 몇 번씩 버스를 타고 나가 훈련에 나섰고, 보조요원도 없이 노병렬 감독의 그 짧디짧은 영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준결승전이 있던 날 한수안은 계체를 마치고 숙소에서 감독이 밥 차려주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감독이 오지 않아 레슬링선수들 방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노 감독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득달같이 나가자고 했다. 한수안이 “밥도 안 먹었는데요”라며 한마디 하니까 감독의 대답은 이랬다. “경기장 가서 먹어.” 오후 7시인 줄 알았던 준결승전이 4시로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노 감독이 혹시나 해서 경기장에 들렀는데 한수안이 상대할 이탈리아 선수가 몸을 풀고 있어 의아해경기진행본부에 물어보고서야 알게 됐단다.

경기장에 도착해 글러브를 끼고 있는 한수안에게 감독은 매점에서 사온 빵과 주스를 먹으라고 내밀었다. 한수안은 퉁명스럽게 “굶은 채로 싸우겠습니다”라며 거절했다.” 런던에서 줄곧 찬밥신세였는데다 경기를 앞두고 빵을 내미니 열이 오를 수밖에. 올림픽 준결승에 밥도 못 먹고 출전한 선수는 아마도 한수안이 유일하지 않았을까. 역시 복싱은 밥 굶고는 할 수 없는 운동인가보다. 한수안은 1회에 KO 직전까지 몰리다 공이 울려 살았다. 그런데 상대는 때리다 지쳤고, 한수안은 오랜만에 맞다보니 오기가 되살아났는지 2회부터 상대 선수인 반디넬리를 두들겨 팼다. 그런데 떨어뜨려 놓으면 맞을까봐 한수안을 계속 붙들고 늘어지며 2회와 3회를 홀딩으로 버틴 반디넬리에게 심판은 경고 한 번 주지 않았다. 결국 2대3, 한수안의 판정패.

한수안의 경기에 앞서 준결승을 치르고 결승에 이미 진출한 선수는 아르헨티나의 파스큐알 페레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한수안 경기의 심판은 아르헨티나 사람. 지금 같으면 이런 심판 배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랴, 그때는 지금이 아닌 걸. 한수안의 주먹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안 아르헨티나 심판은 2회와 3회 내내 두들겨 맞은 이탈리아 선수의 손을 들어준다. 결국 페레스는 금메달을 가져갔고 한수안은 심판 때문에 금메달을 도둑맞고 만 셈이었다.

당시 동메달 두 개는 금메달 한 개를 딴 인도와 함께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좋은 성적이었지만, 아쉬운 결과였다. 사실 당시 세계적 수준의 선수는 꽤 있었지만 국력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컨디션 조절은커녕 음식 조절도 모르던 한국선수들이었고 해외에 나가 우왕좌왕하다 밥도 제때 못 찾아먹던 시절이었기에 이런 웃지 못할 사연은, 아니 웃을 수밖에 없는 사건은 너무 많았다. ‘세계속의 한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참조 : 탈영해서 딴 헬싱키올림픽 동메달

10 thoughts on “KOREA 이름으로 올림픽 첫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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